2012년 7월 22일 일요일

최항1(권력 승계와 김준의 등장)


최우는 30년간 실질적으로는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다가 70이 넘은 나이에 죽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인 최충헌보다 더 확고한 권력을 다졌다고 할 수 있고 또 아버지보다 더 유능한 통치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사위인 김약선을 마음에 두기도 했으나 자객을 보내 제거해 버렸다. 김약선의 아내이자 그의 딸이 모함해서 죽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물론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위의 정치적인 행보가 최우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에 벼르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딸의 무고는 사위를 죽이게 한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최우가 김약선을 후계로 마음먹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두 서출 아들 만종과 만전을 승려로 만든 일에서 추측할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의 멀쩡한 두 아들을 곁에 두고서는 김약선이 제대로 정치를 해나갈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김약선은 그를 후계로 찍은 장인에게 잘못 찍히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최우는 초조해졌다. 사위를 없애고 보니까 마땅한 후계가 없었다. 아들을 따로 보아 클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늙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사위를 죽였을 때 그의 나이가 60이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김약선의 아들(김미)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였고, 믿고 맡길만한 인물이라는 믿음이 들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망나니 두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드라마 무신의 경우처럼 김준이 만종과 만전을 돌아가며 만나고 나서 동생을 후계자로 결정한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다. 김준, 최양백, 이공주 등은 아직은 최우의 가노로서 권력의 전면에 나설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드라마는 김준을 주인공으로 하다 보니 작가가 그렇게 꾸며 놓은 것일 뿐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절로 보내 놓은 두 아들이 온갖 행패를 부려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아버지가 친히 불러 다스려야 한다는 고발 편지를 연속으로 받고 최우는 일단 두 아들을 강화도로 소환하라고 지시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형부상서 박훤과 경상도 방면을 순시하던 순문사 송국첨이었다.
 
최우는 감찰어사 두 명에게 다단히 지시를 내려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로 보냈다. 이들은 내려가서 신속하게 조처를 취했다. 두 아들이 축재한 곡식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 문서도 몽땅 불태워 버렸다. 아울러 두 아들과 더불어서 행패를 부린 문도들도 전부 가두었다.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두 아들이 최우 앞으로 끌려왔다. 이때 이들의 친누이도 같이 변명을 하기 위해 합석했다고 한다. 그들은 울면서 최우에게 호소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이럴 진데 훗날에는 어찌 저희들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도 우리 두 아들을 이렇게 헐뜯고 있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만종과 만전이 최우에게 눈물로 호소한 것이었다. 이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만종과 만전이 망나니짓을 한 것이 틀림이 없지만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헐뜯은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아직 후계자가 결정이 되지 않았기에 경쟁력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위치한 그들을 쫓아내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자기들이 내세우는 후계자를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아마 최우는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또 같은 피의 작용도 있었을 것이다. 최우는 결국 고자질 편지를 보낸 박훤과 송국천을 유배를 보내거나 좌천시켜서 쫓아내고 두 아들을 선택한다. 그가 형을 제치고 동생을 낙점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나마 동생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만 드라마 무신처럼 이공주를 보내 선택되지 못한 형을 죽이는 따위의 일은 없었다.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항’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아무 힘도 없는 그를 위해서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가치치기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최항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등 둘째 아들이 권력을 승계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힘을 실어 주어 나갔다.
 
최항이 환속을 한 이듬해인 1248년 3월, 최우는 최항을 추밀원지주사(정3품)으로 승진시키면서 그의 가신 500명을 나누어 주니 드디어 둘째 아들에게로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다. 그 정도면 최소한 정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군사력은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최우가 죽기 1년 전이었다. 너무 늦은 승계였다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살아생전에 가지치기를 해주긴 했지만 최우가 죽자마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아직은 최항의 권력이 공고하지 않는 상태라 최우의 측근들 중에서 왕정복고를 꿈꾸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주숙과 김효정이었다. 이들은 도방에 소속된 장군들이어서 도방의 군사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주숙은 결단력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측근 무장들 70여 명이 최항 편에 설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해 버린 것이었다. 이 속에 최우의 가노 세 사람이 들어가 있었으니, 이공주와 최양백 그리고 김준이었다.
 
이때 최항을 옹립한 공으로 해서 이 삼인방은 비천한 출신이면서도 나중에 모두 별장(정7품)의 벼슬을 하사 받는데, 고려시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김준이 무신 시대의 전면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시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드라마 무신에서처럼 최우가 김준을 면천시켜 벼슬을 주었다든지 그의 아들을 맡기고 앞날을 부탁했다든지 한 일은 없었다. (다음으로 계속, 이승한의 고려 무인 이야기 참조)
<조열태 씀. 역사소설 ‘진주성 비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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